본문내용 바로가기

최초의 야구선수들
서재필과 재키 로빈슨2014/10/06by 현대자동차그룹

한국인 최초의 야구선수 서재필,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
야구 역사의 두 인물을 소개합니다

한주먹에 감기는 야구공으로 오랜 야구의 역사를 써왔습니다

ㅣ 한주먹에 감기는 야구공으로 오랜 야구의 역사를 써왔습니다



서재필은 익숙한 이름입니다. 갑신정변, 독립운동가, 〈독립신문〉 등 그의 수식어 또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 최초의 야구 선수였다는 점은 그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그의 많은 업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인 데다, 지금껏 최초의 한국인 야구 선수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던 탓입니다.



한국인 최초로 그라운드에 선 6번 선수, 서재필

독립신문으로 친숙한 이름인 서재필, 한국 최초의 야구 경기에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ㅣ 독립신문으로 친숙한 이름인 서재필, 한국 최초의 야구 경기에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최초의 야구 선수는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1904년 창설한 YMCA 야구단 단원들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1년 중앙대학교 손환 교수와 이가람 씨가 ‘한국 최초의 야구 경기에 대한 고찰’ 논문을 〈한국체육학회지〉에 발표하면서, 서재필의 야구 선수 경력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독립신문〉의 영문판 〈The Independent〉의 기사를 인용해 서재필이 한국 최초의 야구 선수라고 주장한 것인데 그 근거는 이렇습니다. 1896년 4월 26일자 신문은 “4월 25일 오후 2시 30분, 서대문 밖 모화관 근처의 공터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미국인들과 미국 해병대원들이 야구 경기를 벌여, 해병대 팀이 2점 차로 승리했다”고 실었는데, 두어 달 뒤 6월 23일 재차 열린 경기를 소개하며 선수 명단을 공개했습니다. 그 명단에 필립 제이슨, 즉 서재필의 미국식 이름이 소개됐다는 것. 따라서 서재필은 YMCA 야구단보다 10년 정도 먼저, 6번 타자 겸 중견수로 출전해 활약했다는 설명입니다.

과감한 시도를 두려워지 않았던 개화파 지식인 서재필
ㅣ 과감한 시도를 두려워지 않았던 개화파 지식인 서재필

한국인 최초의 전문의, 한국인 최초의 민간신문 발행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과감한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데, 야구 선수 경력 또한 없던 길을 개척했던 개화파 지식인의 단면이 아닐까요.



흑인의 명예까지 높이다, 재키 로빈슨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

ㅣ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

매년 4월 15일은 미국 야구계의 특별한 날입니다. 이날 열리는 메이저 리그 경기에서는 모든 선수가 42번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나섭니다. 1947년 4월 15일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의 42번 선수로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한 날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재키 로빈슨이 등장하기 전까지 흑인은 메이저 리그에서 뛸 수 없었습니다. 흑인의 인권이 조금씩 인정받고 있었지만 차별은 여전히 극심했던 것. 재키 로빈슨 또한 선수 생활을 하며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살해 협박 편지를 받기도 했고, 원정 경기에서는 동료와 숙소조차 함께 쓰지 못한 채 흑인 전용 호텔에 묵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근성이 있었습니다. 10년간 통산 타율 0.311, 안타 1,518개, 홈런 137개, 타점 734점을 기록한 것은 결코 타고난 역량만으로는 이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리를 자주 옮기며 다재다능한 실력을 쌓았고 격한 슬라이딩, 다이빙 캐치 등의 특기를 갈고 닦았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팀의 승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너지거나 인기를 잃으면 흑인의 인권이 함께 퇴보할 것이라는 생각에 각종 사교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했습니다. 미국 사회 전반에서 흑백 차별이 사라질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이러한 노력이 한몫했을 터.


그의 42번은 영구결번되어 오직 그만의 번호로 남았습니다
ㅣ 그의 42번은 영구결번되어 오직 그만의 번호로 남았습니다

재키 로빈슨은 1962년 흑인 최초로 야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1997년, 42번은 누구도 달 수 없는 결번으로 선정돼 지금껏 오로지 그만의 번호로 남아 있습니다. 거친 가시밭길을 헤쳐나가며, 뒤따르는 이를 위해 길을 닦은 그의 업적을 영구히 보존한 것입니다.



▶ 현대자동차 사외보 현대모터 2014년 9월호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