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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제본가 조효은
이야기를 꿰매는 여자2014/12/16by 현대자동차

책과 함께 추억까지 엮어가는
예술제본의 정신을 느껴봅니다

제본된 책들
| 손으로 한 올 한 올 책을 꿰매는 느낌, 어떨까요?



세월의 흔적을 입은 책이 그녀의 손을 거치면서 새로운 책으로 태어납니다. 말끔한 겉모습이지만 그 또한 전과 다를 바 없이 앞장과 뒷장으로 이뤄진 책이지요. 하지만 책장 사이사이에는 예술제본가 조효은이 숨겨놓은 수많은 이야기가 오롯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책에 생명을 불어넣다 

예술 제본가 조효은
| 예술 제본가 조효은

예술제본은 책을 보다 견고하고 아름답게 보존하기 위해 하는 일련의 보수?복원 과정으로, 국내에서는 아직 낯선 분야지만 유럽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기계로 책을 만들기 전까지 오로지 사람의 손으로만 책을 만들었습니다.

예술제본의 과정은 녹록지 않습니다. 제본용 책이 아닐 경우 책장을 하나하나 손으로 분리해 보수하고 재단기로 가장자리를 자른 다음, 조합기에 넣어 책등을 톱질해 홈을 내고 수틀에 연결한 후 손바느질로 가지런히 묶습니다. 책등을 망치로 두드려 둥글리고 나면 헤드밴드를 만드는데, 얇디얇은 실을 교차해가며 말 그대로 한 줄 한 줄씩 만듭니다. 표지로 사용할 가죽도 일주일에 걸쳐 수차례 갈아냅니다. 이처럼 한 권의 책이 예술제본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필요한 과정만 60단계이고, 소요되는 시간은 최소 1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입니다. 하지만 이 기나긴 작업 시간 동안 제본가의 머릿속엔 오직 두 가지만 존재합니다. 책과 사람입니다.

실제본 작업중인 책
| 예술제본은 책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입니다

“예술제본은 단순히 책 표지를 예쁘게 만드는 일이 아니에요. 책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그 책과 관련된 다양한 추억까지 담는 작업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전 제본 주문을 받을 때면 책을 소장하시는 분과 대면 상담을 해요. 평소에 자주 꺼내보는 책인지 보관용인지 어떤 사연이 담긴 책인지를 파악하는데, 그렇게 제본하다 보면 같은 책이라도 소장자에 따라 제본 후의 모습이 달라지죠.” 

여러가지 색의 제본실

표지용 가죽과 제본실
| 책장을 하나하나 손으로 분리해 보수하고 재단기로 가장자리를 자르고 책등을 톱질해 홈을 내고… 녹록지 않은 예술제본의 과정

이렇게 제본 후의 모습이 각양각색이듯 예술제본을 의뢰하는 책의 종류 또한 다양합니다. 한 권에 80~100만 원을 호가하는 비용이 들기 때문에 흔히 예술제본은 비싸고 좋은 책으로만 작업해야 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그녀는 “종이의 좋고 나쁨은 있을 수 있겠지만 책의 훌륭함 여부는 재단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책은 개개인에 따라 그 가치가 달리 측정되는 것인 만큼 ‘특별함’과 ‘좋음’의 여부는 상대적이라는 것이지요.

“와병 중인 어머니께 특별한 선물을 드리고 싶다며 어머니께서 평생 써온 일기장을 제본해달라고 의뢰받았을 땐 신기하다 정도의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약속한 날짜가 아닌 1년이 훨씬 지난 어느 날, 의뢰하신 분이 완성된 책을 찾으러 갑자기 오셨더라고요. 책이 완성될 즈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선물로 제본을 시작한 책이 유품이 된 셈이죠. 그런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업을 제가 할 수 있었다는 게 정말 감사하고 기뻤어요.” 

문양을 형압하고 가죽을 자르는 도구들
| 한 권의 책이 예술제본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과정만 60단계라고 합니다

그녀는 이 일 외에도 괴테의〈파우스트> 초판본 작업을 했으며 20년 동안 쓴 자녀의 육아일기나 연애편지를 모아 책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책을 작업해온 그녀지만 작업을 하면 할수록 새로운 책을 만날 때의 설렘은 더 커진답니다. 마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을 키워가는 것처럼 새로운 책이 주는 감촉과 냄새, 책장 사이사이에 남아 있는 세월의 흔적을 통해 숨겨진 이야기를 느끼며 그것을 고스란히 예술제본이라는 결과물로 피워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술제본의 길을 얽다

오래된 책
| 순간의 결과가 아닌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은 예술제본과 우리네 삶의 공통점입니다

대부분의 인연이 그러하듯 조효은과 예술제본의 인연은 찰나의 순간 일어났습니다. 2001년 대학 경영학과에 다니던 중에 TV를 통해 예술제본을 알게 된 것이지요. 어릴 적부터 워낙 책을 좋아했고 취미로 배워두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시작한 예술제본의 매력은 생각보다 깊고 강했습니다. 그녀는 3개월 만에 예술제본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노라 마음먹고 국내 최초의 예술제본가인 백순덕 선생 밑에서 7년 동안 사사했습니다. 선생께서 갑작스럽고도 황망하게 곁을 떠나기 전까지 말이지요.

“스스로 선생님의 뒤를 이어 렉또베르쏘를 이끌어갈 만한 깜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나라 예술제본의 시발점과 같은 이곳을 없어지게 둘 수는 없었어요. 오래전부터 제본을 함께해온 학생들과 선생님 가족분들의 도움 덕택에 제가 이렇게 이어가고 있지요.”

스승의 뒤를 이어 국내 예술제본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인 렉또베르쏘를 씩씩하게 운영해가는 그녀지만 스승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때도 많았습니다. 가르침대로 그저 열심히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든든한 산이 사라지자 외로움과 두려움이 그녀를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흔들리는 그녀를 다잡은 것 또한 예술제본이었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오롯이 책과 마주 앉을수록 작업에 대한 애정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갔습니다.

“예술제본은 우리네 삶과 참 많이 닮았어요. 순간의 결과가 아닌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이 특히 그러하죠. 수강생들이 마치 간증하듯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는데 ‘욕심을 내다보니’와 ‘서두르다 보니’예요. ‘빨리 다하고 말겠어!’라거나 ‘이 정도쯤이야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대충 지나가면 꼭 그에 따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 예술제본이죠.”

예술제본은 마치 건축물처럼 어렵고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무엇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욕심내지 않고 한 단계 한 단계씩 올바르게 쌓아가야 하며, 스스로 많은 시간을 투자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13년이라는 인고의 나날을 견디며 어엿한 예술제본가로 성장한 그녀는 앞으로 자신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국내 예술제본의 발전을 위한 든든한 디딤돌이 되고자 합니다. 

스케치를 하고있는 조효은씨
| 조효은 그녀는 낱장의 종이 하나하나를 꿰매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것처럼 꿈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서울과 분당, 대전의 렉또베르쏘 외에도 예술제본 공방들이 생겨나고, 좋은 책을 만들 수 있도록 토대를 다져가고 싶어요. 이를 위해서 체계적인 예술제본 교육의 자리도 마련할 예정입니다. 더불어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소박한 저만의 작업 공간을 마련해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읽고 마음껏 제본하는 것이에요.”

그저 국내에 예술제본이 굳건히 자리 잡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길이 거대하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그녀는 낱장의 종이 하나하나를 꿰매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것처럼 조금씩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 사외보 현대모터 2014년 12월호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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