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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버스, 타임머신이 되다
버스를 타고 시간을 여행하는 방법2015/12/14by 현대자동차그룹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일상은 생각보다 쉽게 특별해질 수 있다.
여행 티켓으로 기꺼이 1,200원을 지불할 마음가짐만 있다면

7일 간, 취재를 가장한 버스 여행이 시작됐다
l 7일 간, 취재를 가장한 버스 여행이 시작됐다



하루에 서울을 지나는 버스는 8,979대고 이용자 수는 500만 명이 넘는다. 누군가에게 버스는 출퇴근 만원버스의 고단한 일상으로 기억될 테다. 하지만 나는 대학시절 버스를 타고 다니며 낭만성을 발견했고, 버스에 대한 근사한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버스에 대한 기사를 쓰리라 생각하고, 버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다.

이 말을 선배에게 했더니 선배가 말했다. “나도 예전에 와이프랑 연애할 때 맨날 12번 타고 집에 데려다줬는데! 그게 지금 472번일걸? 추억이네. 하하….” 찾아보니 생각보다 버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버스에 대한 잡지를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또 다른 선배도 “동지를 찾았다”며 허허 웃었다. 나는 일주일간 수많은 동지들을 만났고 그들이 추천한 버스를 탔다.



시간 여행자의 버스 110번

세검정에서 지금의 이태원까지. 110번은 조선 후기의 흔적과 현재의 트렌드까지 엿볼 수 있는 ‘시간여행’ 버스다
l 세검정에서 지금의 이태원까지. 110번은 조선 후기의 흔적과 현재의 트렌드까지 엿볼 수 있는 ‘시간여행’ 버스다

“110번 버스를 좋아해요. 노선이 동그란 시계 모양인데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오래된 동네부터 ‘핫’ 플레이스까지 전부 볼 수 있거든요. 그러면 마치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어요.” 잡지 ‘생각버스’를 발행하는 대학생 이혜림씨가 내게 말했다. ‘시간여행’이라는 말에 매료돼 며칠 뒤 바로 110번에 올랐다. 바람이 차고 하늘은 다소 흐린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110번 버스는 110A와 110B번으로 나뉘어 시계 방향과 반 시계 방향으로 순환한다. 지하철 2호선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출발지는 서울 종로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자(亭子) 세검정이었다. 버스는 홍지문을 지나 오래된 아파트 단지들을 거침없이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70년대의 타워팰리스’라는 유진상가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서도 아파트를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유진상가는 연예인, 정치인 등 유명인사들이 살던 몇 안 되는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하지만 이제는 재개발을 앞두었다.

버스는 계속 달렸다. 연희동ㆍ연남동을 거쳐 신촌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우르르 버스에 올랐다. 길거리에 외국인이 많이 보인다 했더니 이번엔 서울의 ‘핫 플레이스’라는 녹사평ㆍ이태원이다. 완벽히 현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버스는 현재에서 다시 과거로 향했다. 마장축산물시장ㆍ제기동 약재시장 등을 지날 때 창 밖의 풍경은 또 한 번 변했다. 종점인 정릉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그렇게 나는 버스를 타고 시간을 건넜다.

정릉동을 걸어 내려오다 붕어빵을 한 아름 샀다. 입에 물자 뜨거운 팥소가 터져 나왔다. 한 도시의 흥망성쇠를 돌아보고 온 하루에 제법 어울리는 간식이었다.



버스 여행가들의 뮤즈 402번

402번은 버스 여행가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버스다
l 402번은 버스 여행가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버스다

대학 신입생 시절 나는 집인 분당에서 홍대까지 1시간 30분 거리를 거의 매일 통학했다. 그러면서 생긴 버릇이 ‘매일 다른 방법으로 집에 가보기’였다. 버스를 3~4번 갈아탈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마주한 서울 풍경이 무척 재미있었다. 그 일환으로 타게 된 402번 버스에서 난 내가 오래전부터 꿈꾸던 풍경을 발견했다. 남산 허리에 나 있는 길, 그 아래 펼쳐진 서울의 풍경. 나중에서야 그 길이 소월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소월길은 계절마다 그 모습이 다르다. 가을에는 노란 은행잎이, 봄에는 벚꽃과 개나리가 만발한다. 이 길을 402번 버스는 광화문과 강남을 오가며 매일 넘는다. 버스 여행가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버스다. 5년 전부터 건강을 위해 자가용 대신 버스를 타게 됐고, 이후 진정한 ‘버스 여행가’의 길을 걷게 됐다는 중앙일보 사진기자 권 모 선배는 “서울 버스 여행과 관련된 사진이 필요해요. 선배”라는 내 부탁에 이렇게 답했다. “그럼 일단 402번을 찍어야지!”

시인 김소월의 호를 따 이름 붙여진 소월길. 일생을 외로이 시심(詩心)으로 살아온 시인처럼 늦가을 소월길은 찬란하다. “이야, 저거 봐라”하며 사진기자 선배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세상에, 은행잎이 바람결을 따라 눈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시야를 채우는 노란 빛깔 속에 파란색 간선버스 402번은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나와 선배는 차를 타고 버스 뒤에 따라붙어 연신 사진을 찍었다. 찰나의 아름다움을 프레임 안에 넣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402번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월길을 지나 한남대교를 건너 강남 방향으로 향했다. 꿈에서 깨어난 듯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을버스의 낭만을 아시나요

“종로 02번을 타면서 느꼈던 사람들과의 교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l “종로 02번을 타면서 느꼈던 사람들과의 교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서울의 버스 여행가들을 수소문하다 만난 책 『서울 재발견』의 저자 이지나 씨는 특이하게 마을버스 마니아였다. ‘웬 마을버스?’ 반신반의하며 이 씨와 대화를 나누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돼 버렸다. 특히 이 부분에서다.

“아카시아꽃이 만발한 와룡공원길에 진입한 순간, 저를 비롯한 버스에 탄 승객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창문을 열었어요. 그 순간 느꼈던 사람들과의 교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이씨가 마을버스 종로 02번을 타면서 목격한 풍경이다. 종각ㆍ삼청동에서 성균관대 후문까지 가는 이 버스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감사원에서 성균관대 후문으로 이어지는 와룡공원 길이다.

내가 종로 02번에 올랐을 때는 절정으로 치닫던 단풍이 지고 나무들은 낙엽을 떨구고 있었다. 나무들 아래로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버스는 곡선 구간을 따라 도로를 여유롭게 오르내렸다.

일상에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묘한 설렘을 맛볼 수 있다
l 일상에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묘한 설렘을 맛볼 수 있다

기사 마감이 턱 끝까지 쫓아오던 터라 나는 매일 버스를 2~3종류씩 타곤 했다. 종로 02번을 탄 날도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른 버스를 탔다. 한성대에서 길상사로 가는 성북 02번이었다. 오후 5시쯤, 하늘에 겨우 걸려있는 해를 붙잡고 한성대 앞에서 버스를 탔다. 이 버스가 가는 길은 ‘마을버스’의 취지와 아주 잘 맞아 떨어진다. 버스는 성북동 좁은 골목길을 아슬아슬 올라갔다. 동네 작은 구멍가게 앞에서도 잠시 섰다. 이윽고 버스는 길상사에 도착했다. 길상사는 불자 외에도 늦가을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이었다. 나는 법정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길상사를 한 바퀴 돈 뒤 해가 질 때까지 그곳에 남아있었다. 하루가 그렇게 저물었다.

지난 11월, 그렇게 취재한 내용으로 〈”차창 밖 풍경 보면 위로가 돼요” 402번 기사님 오라이~〉 기사를 지면에 발행했다. 이후 기사를 읽은 지인으로부터 많은 연락을 받았다. 그들은 내게 좋아하는 버스를 추천하기도 했고 자신의 추억을 공유하기도 했으며 왜 취재를 하면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이처럼 내가, 또 나의 지인들이 버스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은 건 버스는 바로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일상이라는 것이 마냥 낭만적일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만 그 일상에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묘한 설렘을 맛볼 수 있다. 일상이 특별해지는 건 생각보다 별 게 아닐지 모른다. 여행 티켓으로 기꺼이 1,200원(간선·지선버스 성인 카드 기준)을 지불할 마음가짐만 있다면.



글.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부문 홍상지 기자
사진.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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