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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 에르미타주 궁전 그리고 자금성
세 궁전 속 비하인드 스토리2016/05/09by 현대모비스

도시의 트레이크 마크, 궁궐
그 속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합니다

저녁 어스름, 중화전에 조명이 켜진 사진
l 시간이 만든 작품인 궁궐,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인데요. 궁궐 속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지금 공개합니다



세계의 특정 도시를 방문할 때 궁궐을 빼놓는다면 왠지 모르게 해야 할 중요한 일을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시간이 만든 건축 명품, 궁궐. 이곳에 담긴 숨은 이야기를 알아봤습니다.



동양사상의 보고, 중국의 자금성

호수와 자금성을 함께 찍은 모습
l 자금성은 매우 넓고 복잡하여 처음 방문한 사람은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는데요. 태화전을 중심으로 전조후침, 동궁서궁의 원칙만 알면 길 잃을 걱정은 없습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어느 날 갑자기 황제가 된 어린 소년이 자신의 즉위식 날 붉은 휘장이 신기해 뛰어다니는 장면입니다. 네 살짜리 황제가 뛰어다니던 곳은 바로 자금성으로, 중국 베이징의 대표적인 궁궐인데요. 자금성은 크기와 규모뿐 아니라 동양사상의 보고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동양의 전통적인 우주관에 의하면 하늘의 한가운데 노란 옷을 입은 황제가 앉아 있고, 사방에는 4명의 장군이 중앙의 황제를 보필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나무, 불, 물, 철을 각각 상징하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주관한다고 생각했죠. 이를 오행사상이라고 합니다.

자금성 전체를 위에서 찍은 모습
l 땅은 네모나다는 사상에 따라 네모난 땅을 우물 정(井)자로 9등분을 한 후에 그 정중앙에 자금성을 두었습니다

또한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을 네모나다고 믿었습니다. 이때 둥근 형태는 해와 달, 열매와 같이 자연이 만든 원초적인 형태를 말하고 네모는 책과 집 등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형태를 말했습니다. 따라서 중국에서 도시와 궁궐을 계획하는 방식은 우주의 신령한 질서를 땅 위에 인위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었고 자금성도 그에 따라 건축됐습니다.

아울러 북경의 모든 거리는 정확한 격자형인데요. 궁궐은 하늘의 아들인 천자가 사는 곳이었기 때문에 신성시되었고, 그래서 정확하게 네모 반듯하게 지어져야 했기 때문이죠. 자금성을 항공사진으로 찍은 것을 보면 정말로 모눈종이 위에 그린 듯이 정확한 사각형을 하고 있답니다.



박물관이 된,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궁전

에르미타주 건물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l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3대 건물은 무엇일까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3대 건물을 꼽으라면 프랑스의 루브르 궁전, 베르사유 궁전 그리고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궁전을 꼽을 수 있습니다. 모두 절대왕정 시기에 지어졌는데요. 특히, 에르미타주 궁전은 프랑스를 흠모했던 제정 러시아가 지은 궁전입니다. 17~18세기 프랑스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루브르와 베르사유는 프랑스의 가장 화려한 보석이었는데요. 이러한 프랑스를 흠모했던 러시아 귀족들은 일상에서 불어를 사용했고, 심지어 나폴레옹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도 사교계의 귀족들은 무도회에 모여 불어로 그를 비난했습니다.

화려한 에르미타주 내부
l 100년 전, 하얀 겨울궁전이 피로 물든 날로 돌아가 봅니다

1905년 1월 9일,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수만 명의 시위대가 겨울궁전으로 쳐들어왔고 근위대와의 격렬한 싸움 끝에 겨울궁전의 지하 수장고까지 들어갔습니다. 그곳엔 동양과 서양에서 수집한 온갖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했죠.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값진 물건에 화가 난 시위대가 낫과 망치로 부수려 했지만 인민의 고혈로 사들인 인민의 재산이라 생각해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일명 “피의 일요일”이라 불렸던 그 날, 예술품의 파괴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얼마 뒤 궁전은 박물관이 되어 이 모두는 인민에게 공개됐습니다. 인민의 재산이 결국 인민에게 돌아간 거죠. 그리하여 에르미타주 궁전은 프랑스의 루브르, 베르사유 궁전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이자 가장 멋진 박물관이 될 수 있었답니다.



조선의 마지막 궁궐, 서울의 경운궁

경운궁을 위에서 찍은 모습
l 대한제국임을 선포하면서 새로운 궁궐이 필요해졌는데요. 양장을 한 채 온돌방에 앉아 있을 수 없으니 유럽식 황제복을 입은 황제에게 새로운 유럽식 궁궐이 필요해진 거죠 (ⓒ 위키백과)

대한제국임을 선포하면서 1896년, 경운궁(慶運宮)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중심이 되는 중화전(中和展)을 비롯하여 중명전(重明展), 정광헌, 석조전 등이 경운궁의 부속 건물들로 지어졌죠. 이중 정전에 해당하는 중화전만이 전통 양식으로 지어졌고 나머지는 모두 국제화를 표방한 유럽식으로 지어졌습니다.

아울러 중명전은 경운궁 내에 지어진 최초의 양식 건물로서 고종 황제가 외국 사신을 알현하던 곳입니다. 황제는 며느리인 순종 비 윤 씨를 맞아들이면서 피로연 장소로도 사용했는데요. 그 이후 을사보호조약이 바로 이곳에서 체결되었고, 그때 윤 씨는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옥쇄를 치마폭에 숨기는 것으로 마지막 저항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석조전 전체 샷
l 경운궁에서 유명한 건물로는 석조전을 꼽을 수 있습니다. 본디 나무로 집을 짓는 전통 건축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돌을 이용해 궁전을 지었으며, 그 형태는 당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와 바로크 양식을 적절히 혼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위키백과)

어지러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 후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아울러 이름조차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됐는데요. 본디 조선은 경복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 등과 같이 왕이 머무는 정궁에 “경” 자를 주로 쓰고 양위를 한 상왕이 머무는 궁궐에는 장수하시라는 의미로 수(壽)자를 넣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죠. 덕수궁은 황제가 되었던 고종이 그에 걸맞는 국제적 수준의 유럽식 궁궐을 지으려 했던 곳이고, 이후 양위되어 쓸쓸한 말년에 머물렀던 곳입니다. 또한, 그곳은 우리나라에 지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서양식 궁전이기도 합니다.



글. 서윤영 건축칼럼니스트



▶ 현대모비스 사보 2016년 4월호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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