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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슈바이처 이영춘 박사가 머물던 곳
옛집에 기록된 삶의 무늬를 읽다2016/12/12by 현대자동차

양면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공간
이영춘 가옥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이영춘 가옥의 내부
l 이영춘 가옥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어떤 장소는 향기로 기억됩니다. 이영춘 가옥은 은목서 같은 곳이었습니다. 구슬 같이 작고 알찬 꽃봉오리에서 전해지는 아릿한 향기가 푸른 나무 사이를 맴돌았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벌어진 시간의 틈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오래된 가옥에는 한 인물의 긴 이야기도 담겨있었습니다. 이제 이 장소는 이야기로도 기억될 것입니다.



귀한 사람을 모시던 북구의 별장

이영춘 가옥의 내부 복도
l 이영춘 가옥은 전북유형문화재 제200호입니다

옛 시기에 지은 집을 많이도 구경했지만 이 집만큼 독특한 집은 드물었습니다. 전북유형문화재 제200호인 이영춘 가옥. 이 집을 보려고 전북 군산 외곽의 한 대학교 캠퍼스로 향했습니다. 가장 먼저 흔한 학교 건물이 밀집한 캠퍼스 초입에 언덕을 돋운 푸른 정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잘 자란 나무들은 수종이 다양했습니다. 향기를 내뿜는 건 은목서였습니다. 그 너머로 나무와 돌로 지은 집이 있습니다.

단단한 통나무로 장식하고 매끈한 돌을 얇게 깎은 너와를 켜켜이 올린 지붕, 높이 솟은 굴뚝과 정감 어린 호박돌 장식 때문에 소복하게 눈이 내리면 더 어울릴 집입니다. 찬바람 부는 계절조차 따스하게 감싸줄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집니다. 1920년대에 지었으니 100년 가까이 된 집일 텐데 무너지거나 바스러진 흔적이 거의 없습니다. 최근 복원을 단행하기도 했지만 세월을 거뜬히 이겨낸 느낌을 줍니다. 이곳에 몸 담았던 인물, 이영춘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습니다.

이영춘 가옥의 내부, 샹들리에의 모습
l 집은 일본과 한국, 서양의 주택 구조가 섞여 묘한 분위기를 가졌습니다

집에 들어서면 말끔하게 복원된 공간이 맞아 줍니다. 장소에 얽힌 이야기는 활자로 적혀 있습니다. 일식, 한식, 양식이 뒤섞여 있다 해서 절충식 주택이라고 부르는 유형의 집입니다. 장지문으로 구분되는 넓은 방과 내부를 연결한 복도는 일본식 주택 구조였습니다. 그 대신 다다미를 없애고 온돌을 깐 것이 특징입니다.

복도 끝에 자리한 응접실은 창문과 커튼, 샹들리에가 있는 서양식이었습니다. 이곳은 이영춘 선생이 남긴 다양한 유물로 가득합니다. 손때 묻은 귀한 책들이 꽂힌 책장이 오랫동안 눈길을 붙들었습니다. 창가에 놓인 오래된 의자들이 분위기를 돋웠습니다.



의사 이영춘, 구마모토 농장으로 가다

이영춘 가옥의 내부
l 이영춘 선생은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릴 만큼 의학사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이영춘 선생이 군산 개정면(당시 옥구군 개정면)의 구마모토 농장으로 간 것은 1935년 서른세 살 때였습니다. 고향에서 잠시 개원했을 때 가난과 질병, 현대의학에 무지해 고통 받는 민족의 참상을 본 후 농촌의료를 실천하고자 결심한 것이죠. 구마모토 리헤이는 전북 일대에 가장 많은 토지를 보유한 대농장주였습니다. 전북은 미곡수탈의 본거지였고, 전북과 충남 논산 인근에서 철도로 수송된 쌀가마니는 모두 군산항에 차곡차곡 쌓였다가 일본으로 실려 나갔습니다. 그 중심에 구마모토가 있었습니다.

군산 개정농장과 정읍 화호농장에서 생산한 쌀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요? 화호농장의 미곡창고를 보면 가늠이 됩니다. 2층으로 된 거대한 콘크리트 창고는 조용한 농촌마을에 이질적인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지금은 한 동만 남았지만 같은 규모의 창고가 총 다섯 동이나 있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한국 소작농들의 삶과 건강은 피폐해졌습니다. 구마모토는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한국인 소작농을 보살펴 줄 의사를 찾았고, 농촌의료에 뜻을 품은 이영춘 선생이 이에 응답했습니다. 구마모토 농장에 소속된 소작농은 2만여 명. 그는 ‘옥구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들에게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영춘 가옥의 내부
l 해방 후에도 이영춘 선생은 농촌의 의료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영춘 선생은 당시 많은 월급을 받았으나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을 조금씩 도와주느라 정작 자신의 집에는 쌀이 떨어졌다고 하고, 먼 거리인 개정과 화호를 날마다 자전거로 오갔다고도 합니다. 그는 자신이 쓰러질 지경에 이르자 진료소를 설치해달라고 구마모토에게 요청했습니다. 구마모토가 진료소로 쓰라고 내놓은 곳이 바로 구마모토의 별장이자 현재 이영춘 가옥이라 부르는 곳입니다. 구마모토가 일본 도쿄에 거주하면서 추수 때가 되면 이따금 와서 머물렀을 뿐이지만, 백두산 소나무를 쓰고 모양 좋은 돌들을 다양하게 덧붙여 아름답게 꾸며놓은 곳이었습니다. 건축비가 웬만한 대저택을 짓고도 남을 정도로 공을 들인 이 건물을 구마모토가 선뜻 내놓은 건 이영춘 선생에 대한 예의와 믿음이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굴곡을 이겨낸 인간의 삶의 무늬 10여 년을 구마모토 농장의 의사로 헌신한 이영춘 선생은 광복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생연구소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농촌의료의 뜻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결핵과 기생충 감염 같은 질병을 퇴치하려 노력하는 한편, 간호사 양성을 목표로 간호 학교도 설립했습니다. 의료보험과 고아원 일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모든 일은 농촌 사람의 삶을 향상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뜻은 계속 난관에 부딪혔지만 후학을 양성하고 연구하는 자세는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45년간 구마모토 별장에 머물렀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삶이 한 방향으로 올곧게 흘러온 길은 참 아름답습니다. 이영춘 선생의 흔적으로 채워진 저택에서 굴곡을 이겨내며 길을 만든 한 인간의 삶의 무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 대농장주가 지은 이영춘 가옥은 이른바 부정적인 문화유산(Negative Heritage)입니다. 그러나 이영춘 선생의 뜨거운 삶 덕분에 이 장소를 찾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습니다. 과거의 불편한 역사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이영춘 선생이 보여주었습니다.



글. 최예선
사진. 최예선, 신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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