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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을 탄생시킨
모리스 쾨클랭 이야기2017/02/15by 현대엔지니어링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 같은 랜드마크를 만들어낸
숨겨진 엔지니어, 모리스 쾨클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리스 쾨클랭의 사진
l 독창적인 구조 설계 엔지니어, 바로 모리스 쾨클랭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인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 “작은 기회로부터 종종 위대한 업적이 시작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작은 부분이라도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살피고 몰두한다면 탁월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변에 즐비한, 그렇기에 때로는 무심히 지나치게 되는 구조물 역시 사소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던 엔지니어들의 노력이 빚어낸 산물입니다. 여기, 거듭되는 고민 끝에 독창적인 구조 설계를 이룬 엔지니어가 있습니다. 파리 에펠탑과 뉴욕 자유의 여신상을 설계하고 건축한 엔지니어, 바로 모리스 쾨클랭(Maurice Koechlin)입니다.



가려진 이름, 모리스 쾨클랭

에펠탑이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파리의 모습
l 구스타프 에펠의 이름을 딴 에펠탑, 실제 설계와 건축은 모리스 쾨클랭이 진행했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는 각 나라 자체를 떠올리게 하거나 역사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건축물이 존재하며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랜드마크(Landmark)’라고 칭합니다. 흔히 대표적인 랜드마크를 떠올려보자면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두 가지 구조물 모두 주변을 압도할 만큼 두드러지는 외형은 물론 자연 경관과의 조화, 역사적 배경, 상징성 등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명실상부한 랜드마크 중의 랜드마크로 손꼽힙니다. 이처럼 도시를 아우르고 나라를 대표하는 위대한 건축물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탄생시킨 엔지니어가 바로 모리스 쾨클랭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엔지니어 ‘모리스 쾨클랭’은 낯설기 그지없는 이름입니다. 통상적으로 에펠탑은 건축가 구스타프 에펠(Gustave Eiffel)이 직접 기획하고 이 때문에 탑의 명칭 역시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전해지며, 자유의 여신상 역시 그의 주도하에 탄생한 역작이라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펠탑의 경우, 구스타프 에펠은 프랑스 정부가 공모한 탑의 저작권과 특허권을 기부채납 방식으로 사들였을 뿐 실제적인 설계와 건축은 모리스 쾨클랭이 도맡아 진행했습니다. 조각가 프레데릭 오귀스트 바르톨디(Frederic Auguste Bartholdi)가 구스타프 에펠에게 의뢰한 자유의 여신상 내부 설계 역시 실제적으로는 에펠 사의 수석 엔지니어 모리스 쾨클랭이 주축이 되어 깊이 관여한 결과 탄생한 작품입니다. 모리스 쾨클랭은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대형 구조물 설계의 안정성과 심미성 모두를 조화롭게 실현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과 프랑스는 전 인류의 유산으로 길이 보전할 위대한 건축물을 갖게 됐습니다.

1856년 3월 프랑스에서 태어난 모리스 쾨클랭은 도식 역학의 창시자인 칼 쿨만(Karl Culmann)을 통해 엔지니어링 지식과 소양을 갈고 닦으며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기본기를 다졌습니다. 구조와 공학에 관해 다양한 지식을 꾸준히 쌓아나가던 모리스 쾨클랭은 23살이 되던 해 구스타프 에펠이 대표로 있던 건설 회사의 수석 엔지니어가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에펠 사는 철강 및 금속 구조에 있어서 최고라고 불릴 만큼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습니다. 실력 있는 엔지니어들의 집합체로써 업계를 선도하던 에펠 사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동시에 최소한의 재료로 가장 강한 건축물을 만들겠다’는 확고한 신념과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젊은 모리스 쾨클랭은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 발굴에 몰두했고 그 결과, 파리 에펠탑과 뉴욕 자유의 여신상이라는 희대의 역작을 탄생시키는 데 일등공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감각적인 엔지니어링의 극치, 파리 에펠탑

건축 중인 파리 에펠탑
l 파리 에펠탑의 실제적인 설계와 건축은 모리스 쾨클랭이 진행했습니다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EXPO)장에 세워졌습니다. 지금은 ‘파리 서정의 극치’라 칭송받는 에펠탑이지만 건축 당시의 에펠탑을 바라보는 파리 시민들의 시선은 싸늘했습니다.

평론가 레옹 블루아(Leon Bloy)는 에펠탑을 일컬어 “진실로 비극적인 가로등”이라 칭했고, 시인 프랑수아 코페(Francois Coppee)는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우며 일그러진 체육관 장비 같은 철기둥”이라 폄하했습니다. 사람들은 18,038개의 금속 부품과 250만 개의 못으로 이뤄진 높이 320m, 무게 9,700t의 거대한 철골 구조물을 ‘고풍스러운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시민들에게 20년 후 에펠탑을 철거하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파리 시민 모두의 합의하에 무효로 돌아갔습니다. 시내 정중앙에서 아침저녁으로 시민들과 마주하던 에펠탑은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파리 풍경의 일부로 자리 잡았고, 시민들 역시 에펠탑의 묘한 매력에 익숙해지다 못해 정이 드는 지경에 이른 덕분입니다.



오늘날 에펠탑의 모습
l 철거될 뻔했던 에펠탑은 이제 파리 서정의 극치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파리 시민들을 사로잡은 에펠탑만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이 물음의 답 역시 초창기 시민들에게 거부감을 선사했던 모리스 쾨클랭의 독특한 구조 설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에펠탑의 구체적인 형태가 고안되기 전, 그는 몇몇 동료와 함께 300m 높이의 탑을 세우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다른 엔지니어들은 모두 고전적인 직선 형태의 탑을 떠올렸으나 모리스 쾨클랭은 남달랐습니다. 모리스 쾨클랭은 탑을 이루는 재료들이 서로 삼각형을 이루도록 연결한 ‘트러스(Truss)’라는 격자구조를 적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탑의 하단부를 넓게 퍼트려 엄청난 높이와 무게에도 안정적으로 버틸 수 있도록 하려는 방법이었습니다.

에펠탑의 구조 설계가 시작되던 1884년, 모리스 쾨클랭은 도식 역학을 공부하기 위해 연습했던 트러스를 떠올렸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일은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한 모리스 쾨클랭의 책상 위에 컴퓨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1930년 뉴욕 크라이슬러 빌딩이 생기기 전까지, 완공 후 41년 동안 ‘인간이 건설한 가장 높은 구조물’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한 건축물이 그저 한 엔지니어의 감각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모리스 쾨클랭의 구조 설계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에펠탑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감각적인 엔지니어링의 극치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엔지니어링의 정수, 뉴욕 자유의 여신상

공사 중인 자유의 여신상
l 거대한 조각상이자 건축물인 자유의 여신상에도 모리스 쾨클랭의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은 1886년 미국 독립선언 100주년을 기념해 리버티 섬에 세워진 대형 구조물로, 정식 명칭은 ‘세계를 밝히는 자유’입니다. 이 동상은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것으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웠던 두 나라의 역사적 동질감과 깊은 우애를 상징합니다. 자유의 여신상이 자리한 뉴욕항은 미국에 입성하는 모든 이들이 거치는 가장 큰 관문입니다. 광활한 아메리카 대륙의 시작점, 창공을 향해 횃불을 들고 있는 여신상과의 만남은 이민자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전체 무게 225t, 받침대와 대좌까지 포함하면 높이 약 93m에 달하는 이 웅장한 조형물은 조각인 동시에 내부에 박물관, 엘리베이터, 전망대 등을 갖춘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전체적인 구상을 담당한 조각가 바르톨디는 구리판을 얇게 두르려 펴 조립하는 방식으로 외형을 잡아나갈 것을 계획하고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상당한 무게의 구리판 350여 개를 어떻게 이어 붙일지, 표면 면적은 넓은 데다 속은 텅 빈 여신상이 과연 바람의 저항을 버텨낼 수 있을지, 해결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바르톨디는 안정적인 설계를 위해 에펠 사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모리스 쾨클랭은 여신상 내부에 철골 구조물을 삽입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네 개의 수직 기둥으로 된 중심 탑에 견고하게 틀을 짜 넣는다면 무게와 저항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이는 에펠탑 철근 구조 설계에 동일하게 적용된 트러스 공법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모리스 쾨클랭의 예상은 적중했고 총 1,350개의 리브와 세로축을 연결한 중심탑 위로 구리로 된 여신상의 외피가 부착됐습니다. 예술과 엔지니어링의 환상적인 콜라보가 빛을 발한 이 위대한 걸작은 오늘날 전 세계인의 마음속에 영원한 자유와 희망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유의 여신상
l 모리스 쾨클랭이란 엔지니어가 있었기에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모리스 쾨클랭은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의 감각적이고 안정적인 설계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구스타프 에펠의 이름에 가려진 탓에 큰 조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에펠의 이름으로 탑이 명명되고 자유의 여신상 역사에도 에펠의 이름만 대표로 기록되는 동안 모리스 쾨클랭은 묵묵히 자신의 일에 몰두했습니다. 구스타프 에펠 또한 그의 능력을 믿었기에 현업을 떠날 때 주저 없이 에펠 사를 모리스 쾨클랭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 작품을 탄생시킨 숨은 공신, 모리스 쾨클랭. 이제는 드러나야 할 그의 이름을 조용히 되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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