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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정원 & 소쇄원,
정원 보러 떠나는 남도여행2015/05/20by 기아자동차

정원은 뜰 안에 들인 유토피아?
순천만정원과 소새원 이야기

담장 안에 구현한 유토피아를 만나기 위해 남도에 갔습니다
l 담장 안에 구현한 유토피아를 만나기 위해 남도에 갔습니다



정원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은 원예와 조경, 건축을 넘어 역사와 철학, 문학과 미학 등 폭넓은 학문과 예술의 영역을 두루 아우릅니다.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는 것은 이상적인 세계를 향한 가장 격렬한 욕망의 표현일지도 모르죠.



유토피아를 위한 정원 가꾸기

클로드 모네와 헤르만 헤세는 위대한 화가, 작가인 동시에 솜씨 좋은 원예가였습니다
l 클로드 모네와 헤르만 헤세는 위대한 화가, 작가인 동시에 솜씨 좋은 원예가였습니다

말년에 모네는 자신의 최고 명작으로 그림이 아닌 손수 가꾼 지베르니 정원을 꼽았다고 전해지죠. 헤세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망명을 거치며 수차례 거주지를 옮겼지만, 매번 정원을 가꿨다고 합니다. 그는 혼란과 고통의 시대에도 자기만의 세계와 문학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정원에서 비롯되었노라 고백했습니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 슬픈 일들이 있다. 그래도 때때로 꿈이 현실에서 실현되고 충족되는 가운데 찾아오는 행복이 있다. 그 행복이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해도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이 행복은 잠시 동안은 참으로 그윽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 오십여 그루의 나무와 몇 그루의 화초, 무화과나무나 복숭아나무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기분은 그런 것이다”

- 헤르만 헤세,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중에서



자연의 보고를 지키는 에코 벨트

순천만정원은 세계 5대 연안습지이자 생태계의 보고인 순천만의 울타리 역할을 합니다
l 순천만정원은 세계 5대 연안습지이자 생태계의 보고인 순천만의 울타리 역할을 합니다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개최한 이래 정원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순천을 찾았습니다. 정원박람회의 터전 위에 새롭게 단장한 순천만정원은 제1호 국가정원 지정을 앞두고 있는데요. 순천만정원의 가치는 아름다운 조경을 넘어, 세계 5대 연안습지이자 생태계의 보고인 순천만의 울타리 역할에 방점이 찍힙니다.

습지까지 도심이 팽창하는 것을 억제하고자 순천시내와 순천만 사이에 대규모 정원을 조성함으로써 에코 벨트를 형성한 것. 박람회장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순천시의 명소로 거듭났다는 점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거둔 의미있는 성과입니다.

순천만정원은 동천을 사이에 두고 크게 서쪽과 동쪽 지역으로 나뉩니다. 입장은 서문과 동문 어느 쪽을 이용해도 좋지만, 반드시 동천을 가로지르는 꿈의 다리를 통해 반대쪽을 마저 둘러봐야 합니다. 꿈의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면 순천만정원의 절반은 보지 못한 셈이죠.

순천만국제습지센터 주변의 자연습지에서는 수생식물과 야생조류가 어우러져 살아갑니다
l 순천만국제습지센터 주변의 자연습지에서는 수생식물과 야생조류가 어우러져 살아갑니다

서쪽 정원은 크게 수목원구역과 습지센터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목원구역에서 눈여겨볼 곳은 한국정원. 궁궐의 정원, 군자의 정원을 통해 우리 옛 정원의 양식과 정취를 두루 체험할 수 있습니다.

순천은 전국 제1의 철쭉 생산지로도 유명한데, 가장 드라마틱한 꽃사태로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 철쭉정원입니다. 희귀종을 포함한 각양각색의 철쭉 100여 종이 봄의 뒤안길을 화사하게 마감하죠.

순천만국제습지센터 주변의 자연습지는 WWT의 조언이 가장 많이 반영된 공간으로, 수생식물과 야생조류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WWT(Wildfowl and Wetland Trust)는 1946년 영국의 피터 스콧 경이 조직한 단체로, 습지와 야생 조류 보호를 위해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민 단체입니다.

동천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뉜 순천만정원의 두 구역은 꿈의 다리를 통해 연결됩니다
l 동천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뉜 순천만정원의 두 구역은 꿈의 다리를 통해 연결됩니다

습지센터까지 둘러봤다면 꿈의 다리로 동천을 건널 차례. 컨테이너 30여 개를 활용해 만든 꿈의 다리는 정원의 동편과 서편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자원의 재생과 순환’의 의미를 담은 설치미술가 강익중의 작품입니다.

전 세계 어린이들의 그림을 다리 안쪽에 전시한 꿈의 다리는 이동통로이자 갤러리입니다
l 전 세계 어린이들의 그림을 다리 안쪽에 전시한 꿈의 다리는 이동통로이자 갤러리입니다

꿈의 다리는 다리 미술관으로도 불리는데요. 컨테이너 안쪽을 메운 전 세계 어린이들의 그림 때문이죠. 가로, 세로 3인치 화폭에 담긴 어린이들의 꿈이 14만5,000여 점에 달합니다. 알록달록 외벽을 장식한 한글 모자이크 타일은 작가의 일상 속 소소한 깨달음을 전합니다.

웃음과 공감을 유발하는 한 줄 단문이 때로는 시처럼, 잠언처럼 다가오는데, 가령 ‘햇볕에 눈이 부실 때는 찡그리지 말고 웃으면 된다’와 같은 반짝이는 지혜가 도처에 박혀 있지요.

화려한 전통문양으로 담벼락을 수놓은 터키 정원
l 화려한 전통문양으로 담벼락을 수놓은 터키 정원

동쪽 지역엔 세계의 정원이 펼쳐집니다.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바로크 시대 건축 양식을 도입한 프랑스정원, 빅토리아 시대 정원의 아름다움을 재현한 영국정원,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가의 정원을 재현한 이탈리아정원, 튤립과 풍차로 국적을 확실히 드러낸 네덜란드정원, 워싱턴야자/코코스야자 등의 열대수목을 식재한 태국정원 등 나라별 다양한 정원 양식을 볼 수 있죠.

동쪽 정원의 중심지인 순천호수정원은 세계적인 정원 디자이너인 찰스 젱스의 작품입니다. 6개의 언덕과 호수, 이들을 잇는 데크를 통해 순천의 지형을 형상화했습니다. 봉화언덕을 중심에 놓고 난봉, 인제, 해룡, 앵무, 순천만언덕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으로, 호수는 순천의 도심을 나타내며 호수를 가로지르는 데크는 순천시의 젖줄인 동천을 상징합니다.

예부터 호수는 자아를 비추는 거울과 정화의 공간이자, 그 속을 가늠할 수 없어 공포를 안겨주는 장소였습니다. 두려움의 뒷면은 호기심이었으니, 용과 공주와 기사가 사라진 시대에도 네스 호의 괴물을 믿는 것은 이 때문이겠죠. 순천만정원의 ‘몽환’지대를 담당하는 호수정원에선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도 좋습니다.



담장 안에 무릉도원을 구현한 비결

광풍각은 계곡 물소리를 베고 누운 글방이라 하여 ‘침계문방(枕溪文房)’이라고도 불렸지요
l 광풍각은 계곡 물소리를 베고 누운 글방이라 하여 ‘침계문방(枕溪文房)’이라고도 불렸지요

한국의 정원은 자연을 모방하거나 축소하기보다 자연 자체를 뜰 안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특징을 지니는데, 이와 같은 정원 미학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이 담양의 소쇄원입니다.

소쇄원은 1530년경 조선의 선비 양산보가 지은 별서 원림으로, 별서(別墅)란 살림집에서 떨어져 산수 좋은 곳에 마련한 주거공간을 뜻하며, 원림(園林)은 인공적인 조경을 삼가고 동산과 숲의 자연미를 살려 조성한 뜰을 이릅니다.

15세에 조광조를 만나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양산보는 스승이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후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그 충격으로 고향에 은둔했죠. 이것이 청년 선비가 출세의 꿈을 접고 창암촌 계곡에 소쇄원을 꾸미게 된 계기입니다. 맑을 소(瀟), 깨끗할 쇄(灑). 양산보는 이 ‘소쇄’라는 말을 좋아해 자호도 소쇄옹(瀟灑翁)이라 했지요.

소쇄원으로 드는 오솔길의 대나무숲.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도 소쇄원 정경의 일부입니다
l 소쇄원으로 드는 오솔길의 대나무숲.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도 소쇄원 정경의 일부입니다

그는 한평생 소쇄원을 가꾸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 및 문인들과의 교류를 즐겼는데, 김인후를 비롯하여 송순, 정철, 송시열, 기대승 등이 이곳을 드나들었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수양과 학문뿐 아니라 좋은 벗을 사귀고 풍류를 즐기는 일 역시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었으니, 이를 위한 장소인 누정과 별서는 곧 선비문화의 산실이었습니다.

양산보는 소쇄원에 대해 유언을 남기길, 남에게 팔지 말고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할 것이며 어리석은 후손에게는 물려주지 말라 했습니다. 대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지나 계곡 건너편에 자리 잡은 3칸 팔작지붕의 정자가 사랑방의 역할을 했던 광풍각.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읊은 김인후의 <소쇄원 48영(詠)> 중 제2영 ‘침계문방(枕溪文房)’에 해당하는 곳인데, 개울을 베고 누운 선비의 방을 뜻합니다.

문이 닫혀있을 땐 고졸한 암자 같지만, 3면 문짝을 활짝 들어 올리면 호방한 기개마저 느껴집니다. 대숲에 이는 바람과 계곡 물소리가 막힘없이 흐르는 가운데, 시와 술과 이야기는 햇빛이 달빛으로 바뀌도록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거처하는 제월당은 광풍각 뒤편, 소쇄원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습니다
l 주인이 거처하는 제월당은 광풍각 뒤편, 소쇄원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습니다

제월당 역시 3칸짜리 소박한 규모의 집인데요. ‘비 갠 뒤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을 뜻하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을 이름으로 나눠 가진 두 채의 건물 모두 소쇄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맑은 기운이 깃들까 싶어 광풍각 마루에 앉아 <소쇄원 48영(詠)>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시 한 수 읽고, 그 대상을 두리번거리며 더듬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꽃과 채소를 키우며 철학과 삶을 논하는 ‘가든 스쿨(Garden School)’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자연의 이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이며, 이를 통해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여긴 까닭이죠.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제 삶의 뜨락에 무릉도원을,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일일까요. 물길 하나 틀 때도, 꽃나무 한 그루 심을 때도 의미를 부여한 소쇄옹의 촘촘한 무릉도원에서, 은둔자의 뜨거운 가슴과 언어를 짐작해볼 따름입니다. 자연 그대로인 듯 하지만 실은 한 사람의 세계관과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있는 섬세한 세공품이죠.



글. 고우정
사진. 현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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