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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1,000년의 시간을 여행하는
우직한 글자들2014/08/11by 현대제철

대성스틸생산부 임의호 부장 가족과 함께한 활판공방 체험
이날의 소중한 경험을 함께합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납 활자 인쇄 공정으로 책을 찍는 ‘활판공방’

| 국내에서 유일하게 납 활자 인쇄 공정으로 책을 찍는 ‘활판공방’



일명 ‘책 공장’이라 불리는 대규모 인쇄소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파주 출판단지. 디지털 인쇄기에서 수많은 책이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곳에서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곳이 있습니다. 코끝을 스치는 잉크 냄새, ‘철컥철컥’ 활자를 찍어내는 기계 소리, 선반 가득 60여만 개의 활자가 공간을 가득 채운 곳. 현대제철 주요 고객사인 대성스틸생산부 임의호 부장 가족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납 활자 인쇄 공정으로 책을 찍는 ‘활판공방’을 찾았습니다.



활판 인쇄’의 부활을 꿈꾸는 곳, 활판공방

경기 파주추판단지 안 활판 공방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ㅣ 경기 파주추판단지 안 활판 공방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경기 파주출판단지 활판공방은 ‘활자’가 사라진 자리를 ‘폰트(Font)’가 대신하는 시대에, 느리고 불편한 데다 경제성마저 없는 ‘활판 인쇄’를 고집스레 이어가는 유일무이한 곳입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각 신문 사에서는 새벽까지 활자를 조판하고 인쇄하는 작업이 한창이었고,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에 자리한 인쇄소에서는 활판 인쇄기가 쉬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컴퓨터와 디지털 인쇄의 발전 속에서, 직접 금속을 녹여 활자를 만들고 일일이 손으로 조판해 찍어내는 활판 인쇄는 급속하게 자취를 감췄지요. 전국 각지의 인쇄소에서 만들어진 수십만 개의 활자와 그 활자를 찍어내던 주조기, 활판 인쇄기까지 함께 사라지면서 활판 인쇄는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아빠! 여기 좀 봐요. 글자가 가득 쓰여 있어요.” 활판공방에 들어서자마자 한쪽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엄청난 숫자의 활자에 놀란 태형이(9세)는, 자신의 손톱보다도 작은 활자에 새겨진 한글이 마냥 신기하기만 합니다. 어느새 형 옆에서 활자를 살펴보던 태완이(7세)도 “여기 ‘태’자도 있어요!”라며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신이 났는데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오래된 기계와 수십만 개의 활자가 어우러진 모습은 두 아이들뿐만 아니라 엄마와 아빠에게도 낯선 풍경입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 왔는데, 오히려 저와 아내가 더 신기하네요. 저희 학창 시절에는 활판 인쇄로 만든 책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활자와 인쇄기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2007년 박한수 대표가 문을 연 활판공방에는 10년 동안 전국 각지를 샅샅이 뒤져 모은 금속활자와 주조기, 활판 인쇄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곳을 오래된 물건들을 전시해 놓은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이곳에서는 옛날 방식 그대로 활판 인쇄를 통해 책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디지털 인쇄의 발달과 함께 일자리를 잃은 장인들의 손끝에서 활판 인쇄가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활자와 인쇄기를 보고 신난 아이들
ㅣ 활자와 인쇄기를 보고 신난 아이들      



느리고 불편한 활판 인쇄를 고집하는 이유

한 자 한 자 직접 새겨 넣어 자모를 만들고, 섭씨 300~400도의 고온에서 녹인 납을 부어 찍어낸 활자를 원고 내용에 맞게 한 글자 한 글자 조합해 일일이 손으로 찍어내는 활판 인쇄.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글을 쓰고 출력 버튼만 누르면 빠르고 선명하게 인쇄물을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인력도, 시간도, 비용도 상당한 활판 인쇄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008년부터 이곳 활판공방에서 전통적인 활판 인쇄방식으로 만들고 있는 시집, <활판공방 시인 100선>을 보면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손으로 만져보면 종이의 질감뿐만 아니라 글자의 질감이 느껴지네요.” 아내 안정은 씨의 얘기에 가족들도 활판 인쇄로 만들어진 시집을 손끝으로 가만히 따라 읽어본다. 활자를 조판해 압력을 가해 눌러 찍었기 때문에 표면이 매끄러운 디지털 인쇄와는 달리, 활판 인쇄만의 독특한 요철감이 손끝에 전해지지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활자의 영원성
ㅣ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활자의 영원성

“활자는 1분에 60개 정도 만들 수 있고, 인쇄는 많아야 한 시간에 1,500 장 정도 찍을 수 있어요. 그렇다 보니 당연히 디지털 인쇄보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지요. 일일이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기 때문에 지면에 따라서 잉크의 농도나 글자의 모양이 균등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활판공방의 백경원 실장은 그럼에도 활판 인쇄를 고집하는 이유를 시간이 흘러도 변함 없이 보존할 수 있는 ‘영원성’ 때문이라고 했다.

“디지털 인쇄로 찍어낸 책은 50여 년만 지나면 잉크가 흐려지거나 종이가 부식되기 시작해요. 하지만 우리 고유의 한지에 활판 인쇄를 사용해 만든 책은 500년, 길게는 1,000년이 지나도 그대로 보존됩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간직하고 싶은 아름다운 시들을 활판 인쇄로 기록하기 시작했죠. 앞으로도 오래도록 보존해야 할 문서들을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할 예정입니다.”



가족의 손끝에서 탄생한, 세상에서 하나뿐인 책

철판 인쇄를 통해 세상의 하나뿐인 책을 만들다
ㅣ철판 인쇄를 통해 세상의 하나뿐인 책을 만들다

일일이 사람의 손길을 거쳐야 가능한 활판 인쇄. 그 녹록하지 않은 과정을 임의호 부장 가족이 직접 경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활판 인쇄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판권지를 만들고, 전통 제본 방식으로 천자문 책을 만들기로 한 가족. 글자를 새겨 넣는 ‘자모’ 과정과 활자를 찍어내는 ‘주조’ 과정은 공방의 장인들이 손수 만들어 놓은 활자로 대신하기로 하고, 수십만 개의 활자 중 각자의 이름을 찾는 ‘문선’을 시작했습니다. “아빠, 글자가 너무 많아서 찾기가 어려워요.” 이제 막 한글을 익힌 막내 태완이에게는 글자의 크기, 서체별로 빼곡하게 들어 있는 활자 중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찾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 사이 벌써 ‘임’, ‘태’ 두 글자를 찾은 태형이가 “우리 이름은 두 글자가 같으니까 ‘완’자만 찾으면 되겠다”면서 태완이의 어깨를 가볍게 해줍니다. 가족 모두 각자의 이름이 새겨진 활자를 찾은 후, 아빠는 특별히 두 아들을 위해 ‘2014 어린이날 기념’을 새겨 넣을 활자까지 문선을 마쳤다. 각자가 찾은 활자들을 순서, 행간, 자간, 위치 등을 조정해 판을 짠 후, 드디어 활판 인쇄를 시작할 차례. 조판된 활자에 잉크가 채워지고, 양손에 힘을 가하자 하얀 한지에 가족의 이름이 선명히 새겨졌다. “우와! 내 이름이 여기에 찍혔어요. 엄마 아빠 이름도요!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처음 해보는 활판 인쇄가 마냥 신기한 태형이와 태완이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한지를 보고 또 보고, 손끝으로 가만히 글자의 질감도 느껴본다.

“제가 회사에서 하는 업무가 현대제철 코일 센터에서 생산한 코일을 가공해서 다시 자동차 쪽에 판매하는 일이거든요. 아무래도 ‘철’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활판 인쇄 과정에 괜히 정이 가네요. 어린이날이라서 아이들과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현대제철에서 마련한 활판공방 체험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최고의 어린이날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현대제철 활판공방체험에서 직접 만든 책을 가지고 실로 엮고 있는 가족
ㅣ 현대제철 활판공방체험에서 직접 만든 책을 가지고 실로 엮고 있는 가족

전통 제본 방식에 따라 천자문이 새겨진 한지를 실로 엮고 각자의 이름과 ‘2014 어린이날 기념’이란 글자가 새겨진 ‘판권지’를 붙이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활판 인쇄 천자문 책이 완성됐습니다. 화학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한지에 구멍을 뚫어 실로 꿰매서 엮는 전통 제본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튼튼할 뿐만 아니라, 책을 펼치기도 쉽고 시간이 지나도 낱장이 뜯어질 일이 없습니다. 한지에 활판 인쇄로 글자를 새겨 넣었기 때문에 잉크가 날아갈 걱정도 없습니다. 1,000년 후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을 가족의 이름이 새겨진 책을 가만히 만져본다. 뜨거운 온도에서 녹여낸 활자를 가족의 손으로 일일이 조합하고 활판 인쇄를 통해 직접 찍어낸 단 하나뿐인 책. 빠르고 정확한 디지털 인쇄로는 담아낼 수 없는 활판 인쇄만의 따뜻한 온기가 손끝 가득 느껴집니다



디지털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아날로그의 향수와 시간을 거스르는 지속성을 생각합니다. 조판 하나 하나 정성스럽게 만들어 꾹꾹 눌러 찍은 임희호 부장 가족만의 천자문 책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누군가가 그 글을 손으로 더듬으며 임희호 부장의 화목한 가족을 기억할 것입니다.



글. 박향아
사진. 김학리



▶ 현대제철 사외보 푸른 연금술사 2014년 7+8월호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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