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소통의 기술, 소통과 공감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불통에 대해 말하다2016/03/24by 현대위아

“소통한다”고 말할 때 거기엔 명확한 의사 전달의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즘의 '소통'은 이런 작용-반작용 수준에 머물지 않고 정서적 교감을 필요로 합니다

말풍선 모양의 버튼
l ‘불통은 극복해야 할 국면, 소통은 지향해야 할 상태’라는 인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소통에 대해 말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불통에 관해 진술함으로써 소통을 말할 수도 있죠. 굳이 여러 설명 없이 불통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소통에 대한 말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불통은 극복해야 할 국면, 소통은 지향해야 할 상태’라는 인식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입니다.



불통은 견디기 어려운 것

스마트폰으로 SNS를 이용하고 있는 모습
l 비싼 요금제를 쓰는데도 툭하면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 스마트폰 화면에서 불완전한 동그라미만 빙글빙글 도는 상태, 우리가 물리적으로 겪을 수 있는 불통의 상태죠

불통을 쉽게 설명하자면, 뚫려 있어야 할 것이 막혀서 답답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를 만족스러워할 사람은 없겠죠. 비싼 요금제를 쓰는데도 툭하면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 스마트폰 화면에서 불완전한 동그라미만 빙글빙글 도는 상태,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딸에게 전화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라거나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라는 안내말만 기계적으로 되풀이되는 상태. 이런 것들이 우리가 물리적으로 겪을 수 있는 불통의 상태입니다.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
l 우리는 언제부터 거의 모든 영역에서 불통을 인식하고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을까요?

감각적, 정서적, 사회적, 정치적 불통의 상태도 마찬가지로 견디기 어렵죠.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거의 모든 영역에서 불통을 인식하고 소통에 집착했을까요? 과거에 ‘소통’이나 ‘불통’이라는 단어는 홀로 쓰이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교통과 통신에 속박돼 쓰였죠. 차량 소통, 도로 소통, 전화 불통, 기지국 불통, 이런 식이다. 지금 쓰이는 소통의 의미에 그나마 가까운 말은 ‘의사소통’이었습니다.

의사소통은 ‘언어소통’보다 확장된 개념이지만 지금의 ‘소통’보다는 협소하고 쓰임새도 한정적이었는데요. 소통이라는 키워드는 점차 정치 영역을 장악하고 전적 영역으로 확대됐습니다. 스마트폰과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 확산이 상당히 기여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소통’은 대중 용어가 됐고, 우리는 불통에 더 민감해졌습니다.



불통, 그 불감과 결핍의 문제

두 사람이 계단에서 대화하고 있는 모습
l 지금 요구되는 ‘소통’은 이런 작용-반작용 수준에 머물지 않고 정서적 교감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이 “소통한다”고 말할 때 거기엔 ‘명확한 의사 전달’의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요구되는 ‘소통’은 작용-반작용 수준에 머물지 않고 정서적 교감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은 정서적 감흥이 없는 형식적 감응에 만족하지 않을뿐더러 점점 더 깊은 정서적 교감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 불통의 문제는 언어나 의사 불통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 불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죠.

어느새 우리는 감수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옛 노래를 다시 부르는 방송이 인기를 끌고, 위로와 격려가 주를 이루는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릅니다. 정치인들은 ‘감성정치’라며 눈물을 부각하고, ‘감성 마케팅’은 마케팅 방법론의 한 분야처럼 돼버렸죠. 감성지수(EQ)가 주목받기 시작한 게 1990년대 끝자락인데 그사이 감성에 대한 인식도 많이 확장되고 다양해졌습니다.

이 시대가 감수성의 시대인 것은 우리에게 감성이 풍부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빈곤해졌기 때문입니다. 돈이 넉넉하면 돈 얘기를 하지 않듯이 감성이 넉넉한 시대에는 굳이 감성을 강조하지 않을 테죠. 무언가에 집착한다는 것은 그 집착하는 대상에 관한 어떤 결핍을 자백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감수성의 시대는 감성적 결핍의 시대인 것이고, 이 사회가 정서적 교감이 전제된 소통을 강조하고 또 요구함은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풍요로운 소통을 위하여

테이블에 앉아 회의하고 있는 모습
l 우리가 불통의 상황을 답답해하는 것은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고, 불통보다는 소통이 함께 살기에 더 나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소통은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불가피한 것 중에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애초 필연적 고민거리가 되지 않죠. 우리가 불통의 상황을 답답해하는 것은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고, 불통보다는 소통이 함께 살기에 더 나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음 문제는 ‘그런 소통을 어떻게 달성하느냐’인데요. 여기서 그 답까지 낼 엄두는 나지 않습니다. 거칠게나마 ‘소통을 위해선 설득보다 공감이 우선’이라는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글. 강창욱 (국민일보 기자)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