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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은 요란한 것이 아니다
남산 한옥마을에서 만난 디터 람스2016/03/14by 현대위아

시적인 디자인, 산업디자인계의 살아있는 전설
브라운 수석 디자이너 디터 람스를 소개합니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디터 람스의 모습
l 1955년부터 1997년까지 37년간 브라운 수석 디자이너였던 디터 람스(Dieter Rams)를 소개합니다 ⓒ Dieter Schwer



지난가을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로 가족 나들이를 갔다가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내리막길 왼편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 웬 비죽비죽한 기하학 구조물이 생뚱맞게 서 있었죠. 녹슨듯한 밤색 철판으로 벽을 세우고 그 위에 삼각 유리 여러 조각을 맞붙여 지붕을 얹은 모습이었는데요. 앞쪽이 뚫려 있고 벽면에 화살표가 그려져 있으니 우리 가족은 그 건물이 간이 화장실인 줄 알고 들어갔습니다. 딱 그 정도 크기였습니다.



남산골에 전시된 가전제품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제품
l 무엇이 이 대량생산된 공산품들을 특별하게 만들었을까요?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 기하학 구조물은 작은 전시관이었습니다. 다 둘러보고 나와서야 ‘스트리트 뮤지엄’이라는 공식 명칭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이 작은 뮤지엄은 회화, 설치, 미디어 아트 등 각 분야 거장의 작품을 돌아가며 전시합니다. 실내는 한가운데 세워진 기둥을 중심으로 좁은 통로를 따라 원을 그리며 관람하게 돼 있습니다.

당시 벽면 통유리 안에서 파스텔톤 조명에 감싸여 있던 전시품은 1950~70년대 독일 가전제품 제조사 ‘브라운’에서 출시한 계산기, 라디오, 믹서, 커피 메이커, TV, 턴테이블, 축음기 등이었는데요. 모두 수십 년 전 시중에서 팔던 가전제품이었습니다. 이런 제품은 보통 시대가 바뀌면 고철 취급을 받기 마련인데 브라운의 제품들은 예술품 반열에 올라 남산골에 전시돼 있었습니다. 무엇이 이 대량생산된 공산품들을 특별하게 만들었을까요?

마이크를 잡고 강연하고 있는 디터 람스의 모습
l 람스가 브라운에서 디자인한 제품은 라디오, 축음기, 스피커 등 오디오 제품에서부터 라이터, 계산기, 텔레비전, 시계 등에 이르기까지 514개입니다

공산품을 예술품의 반열에 올린 시적인 디자인들은 디자이너 디터 람스(Dieter Rams)의 작품입니다. 람스는 산업디자인계의 살아있는 전설인데요. 그는 1955년부터 1997년까지 브라운에 재직한 42년 중 37년간 수석 디자이너였습니다. 상업 디자인이면서도 예술로 승화한 브라운의 디자인 스타일은 그가 구축한 것입니다.

브라운에서 람스가 구사한 디자인 언어는 간결하고 정확하고 조화롭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그래서 ‘미니멀리즘의 고전’으로도 불리죠. 람스가 브라운에서 디자인한 제품은 라디오, 축음기, 스피커 등 오디오 제품에서부터 라이터, 계산기, 텔레비전, 시계 등에 이르기까지 514개라고 합니다. 1980년대에 처음 나온 오랄-B 칫솔도 그의 손을 거쳤습니다. 브라운이 그동안 시판한 제품이 약 1,300개. 브라운 제품 3개 중 2개가 ‘람스표’입니다.



디터 람스와 조너선 아이브

훈장을 들고 있는 조너선 아이브의 모습
l 람스의 디자인 스타일은 스티브 잡스의 파트너인 조너선 아이브(49)를 통해 애플 고유의 디자인으로 환생했습니다

브라운은 폭넓은 제품군을 거느리고 있지만, 한국에선 남자들에겐 전기면도기, 여자들에겐 핸드 블렌더를 만드는 회사쯤으로 축약되는데요. 사실 람스는 애플 디자인의 원조입니다. 람스는 애플 근처에도 간 적 없지만 그의 디자인 스타일은 스티브 잡스의 파트너인 조너선 아이브(49)를 통해 애플 고유의 디자인으로 환생했죠.

애플 최고 디자인 책임자인 아이브는 스스로 인정하는 람스 추종자입니다. 그는 “아이팟과 아이폰 등 애플의 히트 상품들은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제품들을 참고했다”고 공개적으로 털어놓은 바 있죠. 실제로 아이팟과 아이폰뿐 아니라 데스크톱 컴퓨터 ‘맥 프로’, 모니터 일체형 데스크톱 ‘아이맥’, 아이팟 거치형 스피커 ‘아이팟 하이파이’까지 애플 주력 제품이 모두 람스의 작품을 모방해 만들어졌습니다.

애플의 맥북과 아이패드, 아이폰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모습
l 람스는 “브라운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회사는 애플 말고도 많다”며 애플은 디자인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죠

남산골 전시관에도 브라운 제품과 애플 제품이 비교 전시돼 있었습니다. 때문에 아이브가 람스의 디자인을 훔쳤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요.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이자 람스의 동료인 필립 스타크가 흥분한 어조로 람스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람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죠. 여담이지만 스타크는 2012년 4월 프랑스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 “애플과 혁명적 제품을 준비하고 있다. 연내에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애플은 강하게 부인했고 연말까지도 스타크가 말한 제품은 나오지 않았죠. 람스는 2010년 방한했을 때 “아이브가 애플에서 제품을 내놨을 때 내 것을 표절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많았는데 그는 내 디자인을 발전시켜 나간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해 5월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과의 인터뷰에서는 “브라운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회사는 애플 말고도 많다”며 애플은 디자인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훌륭한 디자인이야말로 혁신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또 다른 제품
l 혁신적인 것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면서도 또 다른 혁신들을 유발하죠. 혁신적인 것을 대할 때 사람은 자극을 받고 영감에 휩싸입니다

여기서 말하려는 건 물론 애플 디자인의 우수성이 아닙니다. 혁신적인 것들의 확장 가능성인데요. 브라운과 애플, 디터 람스와 조너선 아이브의 경우로 볼 때 혁신적인 것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면서도 또 다른 혁신들을 유발하죠. 혁신적인 것을 대할 때 사람은 자극을 받고 영감에 휩싸입니다. 아이브는 어릴 적 부모가 쓰던 람스의 브라운 제품을 접하고 강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람스가 1970년대 후반에 정리한 디자인 철학은 ‘좋은 디자인의 10가지 원칙’으로 불리며 지금도 살아있는 격언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남산골 전시관에도 붙어 있던 이 10계명의 첫 번째 원칙은 ‘좋은 디자인은 혁신적’이라는 것입니다. 람스는 기술적 발전이 항상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디자인 혁신의 가능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바닥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혁신이 휘황찬란해야만 하는 건 아니죠. 혁신은 그 독보적인 성과에 대한 찬사가 요란한 것이지 혁신의 결과물 자체가 요란한 것은 아닙니다. 람스나 아이브의 작품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좋은 디자인의 나머지 9가지 원칙은 혁신의 본질에 대한 설명으로 다음 내용과 같습니다.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하고 아름다우며 아무 설명이 없어도 제품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 또 요란하지 않고 정직하며 오래 간다. 마지막 사소한 부분에까지 철저하고 환경친화적인 ‘최소한’의 것이다. 이렇게 소박하면서 철저한 혁신은 찬란하기보다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글. 강창욱 (국민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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