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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관객 <난타> 제작자
멀티플레이어 송승환2015/04/07by 현대엔지니어링

늘 새로운 길을 만드는 송승환
그 창작의 비밀을 공개합니다

세계를 사로잡은 공연 〈난타〉를 만들어낸 공연제작자 송승환
l 세계를 사로잡은 공연 〈난타〉를 만들어낸 공연제작자 송승환



오이 31만2천900개, 양파 12만5천160개, 양배추 21만9천30개, 도마 2천70개, 칼 1만8천975자루. 17년 동안 〈난타〉에 사용된 공연 소품의 수입니다. 1997년 호암아트홀 초연, 1999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전회 매진, 2000년 상설전용관 오픈, 2003년 브로드웨이에 진출. 태국 방콕에 이어 올해 중국까지 전용관을 오픈하는 〈난타〉의 멈추지 않는 신화는, 현역 배우이자 공연제작자인 송승환 대표의 걸작입니다. 그의 숨은, 아직도 어떠한 들뜸 없이 처음처럼 차분합니다.



‘재미있는 일’을 했을 뿐

“어느 쪽으로 가도 결과를 알 수 없다면 과정이 재미있는 쪽이 낫죠”
l “어느 쪽으로 가도 결과를 알 수 없다면 과정이 재미있는 쪽이 낫죠”

권이현 사원(이하 권) 오늘 선생님을 뵙는다 하니 또래 친구들이 무척 부러워했어요. 저처럼 선생님을 ‘마음의 스승’으로 삼은 사람이 꽤 있을 것 같은데요.

송승환 대표(이하 송) 저는 누구의 멘토가 될 만큼 지혜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에요. 그저 잘한 것이 있다면, ‘내가 잘하는 일’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찾았고, 그것을 즐기기를 체질화했다는 것 정도겠네요.

다른 멘토들처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강요하지도 않으시잖아요?

하하, 그럴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고민의 순간마다 더 재미있는 쪽, 나를 설레게 하는 쪽을 택하면 간단한 것을.

서형덕 과장(이하 서) 더 재미있는 쪽이라, 어떤 말씀이신지요?

이쪽으로 가든 저쪽으로 가든, 어차피 결과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럴 바엔 과정이 재미있는 쪽이 낫죠. 제가 형편이 여유로워서 가능했던 건 분명 아니에요. 오히려 어려웠기 때문에 낚싯대를 동시에 여러 개 드리워야만 했었어요. 드라마와 영화, MC, 라디오 DJ, 연극까지. 가 ‘1세대 멀티플레이어’였던 까닭이 여기 있네요.

오, 이를테면 ‘어장관리’를 하셨던 셈이군요.

하하, 그렇죠. 연기도 재미있고, 제작도 재미있으니까 다방면의 일을 했던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론 먹고살 거리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했지요.

그런데 분야를 넘어서 다 잘하시니까, 그게 또 불가사의인 거죠.

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란 점에서 연기의 근본은 똑같아요. 다만 메커니즘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지금은 공연제작자로 모습을 더 많이 비추니 ‘배우에서 사업가로의 변신’이라 말씀들 하시지만, 사실 배우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뮤지컬 〈라카지〉에서 제작 겸 배우를 동시에 맡고 있지요.

얼마 전 〈난타〉의 천만 관객 돌파가 굉장한 화제였는데요. ‘천만’이란 숫자도 대단하지만, 당시 생소했던 ‘Non-Verbal Performance’(비언어극)를 기획, 지금까지 순조롭게 끌고 온 그 뚝심이 더 놀랍습니다.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픈 예술가의 욕심과 수익성을 고려해야 하는 제작자의 의무가 빚어낸 결과물이 〈난타〉입니다. 우리나라 공연시장은 한계가 있으니 해외시장에도 통할 콘텐츠를 만들어야 했고, 그래서 ‘언어가 없는 공연’을 생각하게 된 것이죠.



상식적이고 간단한, 그 무엇

“세상일은 상식적이고 간단할 때 가장 잘 돼요”
l “세상일은 상식적이고 간단할 때 가장 잘 돼요”

국적을 불문하고 〈난타〉에 열광하는 까닭, 혹시 ‘두드림’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때문은 아닐까요?

제가 이시형 박사님과 ‘세로토닌 드럼클럽’을 하고 있는데요. 박사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우리나라 정도의 경제 수준이 되면, 폭력성이 있는 아드레날린 대신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세로토닌이 더 필요하다고요. 이 세로토닌이 나오는 게 바로 걸을 때와 두들길 때래요. 두드림으로 인한 카타르시스와 세로토닌 분비 때문에 〈난타〉가 흥한 것이 아닐까요?(웃음)

저는 〈다큐멘터리 3일〉을 보면서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15년 동안 함께 한 무대감독, 초연부터 지금까지 계속 무대에 서고 있는 배우를 보면서 〈난타〉라는 콘텐츠 자체에 어떤 ‘중독성’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애정만으론 한계였겠죠. 다른 한편으로 누군가가 대단히 현실적인 마케팅과 관리를 해주었기 때문이에요.

그 ‘현실적인 관리’도 직접 하시나요?

아뇨, 고등학교 동창인 이광호 공동대표가 맡고 있어요.

음, 그럼 20년 가까이 동업을 하신 거군요? 참 쉽지 않은 일인데요.

저는 대본 보는 걸 좋아하고, 친구는 장부 보는 걸 좋아하죠. 그 친구는 심지어 〈난타〉를 봐도 자는 친구예요. 영역이 겹치면 다퉜을 텐데, 저는 장부를 안 보고 그는 대본을 안 보니 서로 싸울 일이 없어요. 그리고 처음 한 약속을 지금까지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회사의 모든 수익은 5:5로 나눌 것, 그리고 둘이 합의한 일만 진행할 것.

듣기엔 참 간단한 것 같지만...

아뇨, 세상일은 말이죠. 상식적이고 간단할 때 가장 잘 돼요. 상식적인 일만 하면 세상에 복잡할 일이 없어요.



스물아홉, 쉰아홉

“한국인의 정서, 아시아인의 정서로 만든 작품을 글로벌화 하고 싶어요”
l “한국인의 정서, 아시아인의 정서로 만든 작품을 글로벌화 하고 싶어요”

2월 27일에 창작뮤지컬 〈난쟁이들〉의 막을 올리셨는데요. 앞으로도 계속 ‘창작극’을 제작할 생각이세요?

그럼요. 〈라카지〉는 남의 대본과 음악을 잠깐 빌려 쓰는 라이선스 뮤지컬이잖아요. 편하긴 하지만 만드는 재미는 없지요. 창작은 백지 상태에서 대본과 음악, 디자인까지 해야 하니 힘들지만 재미있고요. 저는 한국인의 정서, 아시아인의 정서로 만든 작품을 글로벌화 하고 싶어요. 한국 공연인 줄 모를 정도로 글로벌한 〈난타〉 속 리듬이 사물놀이, 우리 리듬인 것처럼.

그래도 선생님의 수많은 성공 뒤에, 분명 ‘값진’ 실패도 존재할 것 같습니다.

1985년, 뉴욕에 가서 3년 동안 머물 때, 사람들은 제가 실패했다고 생각했어요. 옆에서 오토바이 타던 친구가 외제차를 타게 됐는데, 저는 17평 월세로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까요. 저도 잠깐 ‘내가 잘못 나갔었나’ 생각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스물아홉, 쉰아홉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었어요. 그 시기에 보고 들은 것들이 결국 〈난타〉를 만들고, 끊임없이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

선생님 관련된 정보를 찾다가 1984년, 잡지 〈주니어〉에 실린 인터뷰를 보았어요. “끝이라는 느낌과 함께 한꺼번에 스물 아홉 해의 생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아, 자동차 사고 이야기인 것 같네요. 당시 드라마 〈대관령〉 촬영으로 설악산에 가다가 계곡에 차를 처박았던. 소위 ‘아이돌 스타’ 시절이라 TV 드라마와 CF를 잠도 못 자면서 찍었거든요. 그래서 찾은 것이 연극무대예요. 무대에 서면, 반대로 에너지를 충전하는 느낌이었거든요.

연세가 올해 쉰아홉이시잖아요? (웃음) 스물아홉의 승환과 지금의 선생님 사이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글쎄요, 그때나 지금이나 ‘다음 작품을 어떻게 만들까’를 궁리하고 있네요.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꼭 나쁘지는 않더라고요.(웃음)



글. 이현화
사진. 한상무
인터뷰. 전력 서형덕 과장, 화공 권이현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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