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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일상에 한복을 입히다,
한국화가 김현정2015/07/31by 현대파워텍

빨간 열정을 품은 젊은 예술가.
솔직한 그녀의 그림에 빠.져.든.다

내숭과 파격을 그리는 화가, 김현정을 만나봤습니다
l 내숭과 파격을 그리는 화가, 김현정을 만나봤습니다



20대 후반의 젊은 예술가가 대한민국 화단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김현정. 그녀의 작품 속 여인은 모두 한복을 입고 있는데요. 그리곤 역기를 들어 올리고, 쪼그려 앉아 라면을 먹으며, 때론 오토바이를 타고 햄버거를 배달하기도 합니다.



그녀가 한국화가가 된 이유

어릴 적부터 수묵화에 큰 감동을 했어요. 한복의 선과, 색, 문양이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l 어릴 적부터 수묵화에 큰 감동을 했어요. 한복의 선과, 색, 문양이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김현정은 한국화가입니다. 지난 6월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내숭올림픽>에서 전시 기간 10일 동안 24,000명에 달하는 관객을 끌어모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5번의 개인전을 모두 ‘완판’한 그녀는 올해 겨우 28살. 이제 막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이미 대중 속으로 성큼 걸어가 단단한 존재감을 새기고 있습니다. 정통 동양화의 이론과 기법에 기초하되, 창조적이면서도 당돌한 주제와 표현 방법으로 한국 화단의 ‘아이돌’로 불리는 그녀는 왜 하필 한국화가가 되었을까요?

“어릴 적부터 김홍도나 신윤복 선생의 작품을 보면서 수묵화에 큰 감동을 했어요. 또 대가족 속에서 자라며 어르신들이 한복을 입은 모습을 자주 접하기도 했죠. 어린 나이에도 우리 한복의 선과 색, 문양, 장신구가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여러 번 덧칠해도 화면이 탁해지거나 두꺼워지지 않고 오히려 투명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수묵화. 농담의 묘미를 오묘하게 살릴 수 있는 수묵화의 매력은 지금도 그녀를 끌어당깁니다.



회사원처럼 그림 그려본 적 있어?

예술가는 한량이라는 인식도 있지만 웬걸, 5천 점 이상 다작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l 예술가는 한량이라는 인식도 있지만 웬걸, 5천 점 이상 다작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오전 9시, 오늘도 김현정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작업실로 ‘출근’합니다. 물론 그녀는 직장인이 아닙니다. 지각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상사도 없고, 굳이 시간에 매여 근태관리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리 바빠도, 외부 일정이나 미팅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날이라도 매일 일정 시간은 작업에 몰입합니다.

“흔히 ‘예술가는 배가 고프다’라고 하죠. 저 역시 미술을 공부하며 왜 예술가는 가난한지 의구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던 선배를 찾아가 이런 고민을 토로했어요. 선배는 저에게 ‘회사원처럼 그림 그려본 적 있어?’라고 물었죠.” 그 순간 김현정은 자신을 돌아봤다고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그날의 업무를 모두 마치고 퇴근하는 직장인. 화가로서 어떤 마음으로 작업해야 하는지 다시금 되새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김현정은 마치 회사원처럼 작업실로 출근해 작업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간 40여 개의 작품을 치열하게 그려낸 그녀는 2014년 6월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내숭올림픽>을 열었습니다. <내숭올림픽>은 <박수근 특별전>을 제치고 하루 최다 관람객 기록을 세우며 대한민국 화단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젊은 예술가가 그려낸 내숭 그리고 파격

저는 작업을 하면서 거울을 바라보며 일기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l 저는 작업을 하면서 거울을 바라보며 일기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작품 이야기를 해보도록 해요. 그녀의 작품 속 여인은 모두 고운 한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행동이 영 수상합니다. 한복을 입은 채 쪼그려 앉아 라면을 먹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기도 합니다. 우아한 기품이 넘치는 한복을 입었으니 평소보다 더욱 조신하고 조심해야 할 터인데 어째서 이런 파격적이고도 앙큼한 행동을 하는 걸까요? 이는 그녀가 고민해온 ‘내숭’이라는 주제와 이어집니다.

“처음 <내숭이야기>을 구상할 때에는 겉과 속이 다른, 내숭을 떠는 사람들에 대한 희화화의 욕구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작업실의 거울을 보는데 작품 속 인물이 저와 똑같은 거예요! 생김새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는 본질까지도 저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는 걸 깨달은 거죠.

“그때부터는 저의 고백적 자화상과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어요. 저는 작업을 하면서 거울을 바라보며 일기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거울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불편한 일이기도 하거든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지금은 내숭이 심리학적, 철학적 분석대상이 되었습니다.”

김현정은 인물을 누드로 먼저 그린 뒤 콜라주를 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합니다. 이를 위해 독특한 작업방식을 고안했는데요. 먼저 장면의 주인공이 되어 레깅스를 입은 채 몸의 선이 드러나도록 사진을 찍은 후 한복을 입고 똑같은 장면을 다시 찍어 그림을 그립니다.

“한복은 수묵담채와 한지 콜라주 기법으로 표현합니다. 속이 비치도록 표현한 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라는 의미를 담기 위함이에요. 내숭에 대한 관객의 통찰을 유도하려는 뜻이죠. 한지 콜라주 작업을 하기 위해서 한지 제작장인에게 한지 제작기술을 전수하고, 염색장인에게 염색기술을 배워 직접 한지를 만들고 염색해 사용하고 있어요. 작업하는 과정만큼은 ‘타협은 없다’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대중과 호흡하는 미술을 하고 싶다

작업을 하는 과정만큼은 ‘타협은 없다’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l 작업을 하는 과정만큼은 ‘타협은 없다’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김현정은 ‘빨강’하면 떠오르는 작품을 꼽아달라는 부탁에 <내숭 올림픽> 시리즈의 대표작이기도 한 ‘순정녀’를 뽑았습니다. ‘순정녀’는 내숭 올림픽의 종목 중 당구를 표현한 작품으로, 한복을 입은 여인이 당구봉을 잡고 막 공을 치려는 순간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 인물은 탕! 하고 흰 공을 튕겨서 가지런한 질서를 깨뜨리려고 해요. 공을 튕기는 순간, 통념으로 대변되는 기존의 질서는 깨지고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는 거죠. 그 자유로운 파격이 빨강의 이미지와 가장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미술이 누구나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예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미술이 생활 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문화와 구조를 만드는 일에 힘을 보내고 싶고요. 많은 분이 SNS를 홍보의 수단이라고 생각을 하시는데, 저에게 있어 SNS는 제 작업의 일부입니다. 현대미술은 작품을 영감을 받는 것부터 해석의 단계까지 모두 예술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해요.

현재 김현정은 <내숭 놀이공원> 시리즈를 작업하고 있습니다. ‘놀이공원’은 주로 어린이들의 공간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녀는 어른들만의 일상 속 놀이 공간, 즉 해방공간을 담아낼 생각입니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독특한 상상력을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온 김현정이 표현한 어른들만의 놀이공원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녀가 <내숭 놀이공원>을 개장하는 날, 마치 소풍 가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시장을 찾게 될 것 같습니다.



글. 차승진
사진. 이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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